170826 사의찬미 후기
170826 김경수 곽선영 이규형
-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야.
우진은 방아쇠를 분명 당겼다.
화약냄새도 가득했는데, 걸어오는 사내를 보았고.
총은 실제로 발사되었는데
사내에게 그 어떤 상처도 입히지 않았던 게 아닐까.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총구를 입안으로 밀어 넣고,
숨을 몰아쉬다가 킥킥거리며 웃는 사내는 정말로 인간 이상의 관념 그 자체구나, 싶었다.
교활하고 악랄하다는 가사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가 우진의 눈앞에서 (아마도 결말로 추정되는 것을 들고) 태워버리며
세상에 없을 이 결말이 필요하냐고 묻듯 '줘?'하고 묻고.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고, 대본을 다 불태워버렸는데.
- 뭐야 너?
- 친구, 그 이상?
낮공에도, 밤공에도 (가사아님)
우진은 초조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쩌면 사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침착했다.
날이 서 있지만 다정한 목소리여서 비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그 개념을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아 보였던 사내.
- 모든 게 그의 대본대로 되고 있어.
심덕과 우진의 갈등을 불러일으킨 후, 뒤돌아 웃고
'나 노래해 윤심덕이. 고국무대에서.' 입으로 복기하는 사내.
이 부분이 유독 사내가 쓴 사의찬미의 대본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는 부분 같다.
- 이제 곧 우리 차례야.
그가 죽지 않음을 이미 눈 앞에서 확인했고,
방아쇠가 당겨지는 게 그 어떤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되어서.
우진이 더 겁을 먹는 게 아닐까.
'공동의 작가지. 너도, 나도, 독단적으로 만들 수 없어.'
사내의 말처럼 독단적으로 누구 혼자서 이끌어나가는 이야기가 아닌
심덕이 있어야만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의 결말.
혼자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우진은 배에 승선후 끊임없이 심덕을 설득하는 것 같다.
새로운 결말을 쓰기 위해 펜을 다시 드는 우진이 보여주는 생명력.
*
가녀린 영혼들은 절망에 세뇌당해
블쌍한 영혼들은 죽음을 찬미하네
저 가사 자체가 '사의찬미'를 부른 심덕 이야기였다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사내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된 후에 우진이 부르는 '그가 오고 있어'가 처음으로 다르게 들렸다.
(글루미부터 봤는데 왜 이제서야..)
비극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어.
심덕이 찰나에 살기 원한다는 말을 듣고, 사내의 계획이 명확해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은 어둠 속일수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니까.
심덕에게 절망의 시간을, 지옥을 오래도록 경험하게 해서 우진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건 아니었을까 했을 정도로.
그리고, 저 말은 사실 사내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
심덕이라는 히로인을 잃은 건 사내에게도 비극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
김수산, 윤수선
우진이 사내가 만들어놓은 대본대로 살지 않기 위해,
그에게 맞서기 위해 '그만해 제발'하고 흐느끼면서 총을 집어 드는 우진을 보면서.
사내가 쓴 대본 속 인물들의 이름이 우진과 심덕, 이라고 쓰여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어제 공연을 보며 잠시 했었다.
우진이 고쳐 쓴 대본엔 수산과 수선이 있었고.
그 결말을 사내가 모두 다 봤다고 생각해서
모든 걸 다 뒤집듯 결말에 남자와 여자라고 쓴 것도 같았고.
*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나.
고루한 사고방식을 가진, 조선남자였던 우진에게
먼저 손 내미는 심덕을 보고 있으면 묘한 쾌감이 든다.
시대를 앞서 나갔던, 누구보다 당당했던 사람.
신분과 성별을 막론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우진의 앞에 서 있었던 사람.
그런 심덕이 느꼈을 절망감이 우진을 마주한 심덕에게서 느껴졌다.
1926년에도, 그리고 2017년에도 이 세상에 아무도 오해하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심덕이 부른 노래를 극의 이름으로 줬지만,
단 한 번도 이야기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지 못하는 심덕.
그녀가 하는 것이 '선택'뿐이라는 것은 여전히 아쉽다.
-
낮과 밤 온도 차 달랐던 김우진.
덕분에 다른 공연을 본 느낌도 들었다. 물론 낮 밤 둘다 너무 좋았고.
낮공은 정석대로, 밤공은 하고 싶은 디테일 다 집어넣으면서도 과하지 않았던 뀨사내도 좋았고,
지휘하다가 '그리고 사라져라' 하는 부분에서 허공을 가르는 뀨사내의 지휘 봐야하는데ㅠㅠ
치명적이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그리고 사의 찬미때 너무나 안쓰러웠지만 멋있어서(?) 소름 돋게 했던 꽉심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