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2018~

200711 마우스피스

LUN 2020. 7. 13. 17:50

 

 

 

 연극열전의 극들이 해왔던 말이 있다. “괜찮아질 거에요. 길을 잃은 사람들. 그 목소리가 닿을 거에요.” 가능성과 긍정적 기능으로만 점철된, ‘위로’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대사들을 보며 이제 극은 시대성을 포기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마우스피스를 처음 보고 나왔을 때는 끝없는 자기 복제의 메시지만을 전하는구나, 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서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 극은 지금껏 주던 메시지를 전복시키는 극이었다. 괜찮아지지 않을 거고, 그 목소리는 사실 닿지 않을 거라고.


- 마우스피스! 진짜 작품처럼 제목을 붙여준 거죠!

 극의 초반부 리비가 데클란을 다시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데클란은 가만히 듣고 있다. 10대 남성이 40대 여성의 인생얘기를 들으며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앉아 경청한다는 연출 자체를 일단 믿을 수 없으나, 데클란은 리비같은 사람 역시 실패했다는 데서 안도감을 얻은 듯했다.

 리비를 통해 미술관에 가게 되고, 예술적 재능에 대해 알게 되고, 아주 잠시 다른 인생을 꿈꾼다. 데클란은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의 삶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다는 것에 들떠있었다고 말한다. 늘 제자리인 인생. 미술관 벽에서 본 괜찮아질 거라는 말로, 점점 나빠지는 현실에서 등을 돌린다.

 


- 나를 연기한 새끼가 나서서 이건 아주 메타적이래요.

 데클란의 역을 맡았던 배우의 말을 전하는 데클란이 하는 말은 ‘메타적’이었다. 그들에겐 데클란의 인생은 실제와 가짜 사이의 경계 같은, 오로지 극에서 연기로만 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극은 연극을 만들어 연극을 올리는 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리비가 데클란을 처음 만나게 되었던 만남과 함께 리비가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함께 시연된다. 극이 무대에 올라가게 되는 후반부에는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메타적이라는 말로 데클란의 인생을 정리할 수는 없다. 그는 극 속에 분명 실존했던 인물이다.

 


- 저 위에 올라가 있는 건 당신의 피와 살입니다. 당신의 심장, 영혼이죠.

 타인과의 대화를 소설에 그대로 실은 최근의 모 작가 일과 겹쳐 유독 불편했다. 타인의 역사를 자신의 작품에, 인생에 가감 없이 끌어들인 ‘발화자’의 모습을 한 리비가 불편했다.

 해외 리뷰에서 데클란과 리비사이에 이상한, 혹은 불안정한 우정이 싹튼다는 표현을 읽었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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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strange friendship blossoms, and Libby begins to write again; but since Declan is her subject, and her new play composed largely of his words, an increasingly tense and desperate struggle ensues over this middle-class appropriation of working-class experience, culminating in a devastating showdown at the Traverse.

 

https://www.scotsman.com/arts-and-culture/theatre-and-stage/theatre-review-mouthpiece-traverse-edinburgh-191831

 

- As they form an uneasy friendship, complicated by class and culture, Libby spots an opportunity to put herself back on track, and really make a difference.

 

https://sohotheatre.com/shows/mouthpiece/

사랑인지 보살핌인지 연민인지 동정인지. 무엇으로부터 촉발된 지 모르를 10대 남성과 40대 여성의 베드씬. 낮은 조도의 조명과 아무런 음향효과 없이 표현된 이 장면은 꽤 길다.

 리비에 대한 호감이 사라지고, 거부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일로 리비는 데클란을 통제한다. 자신의 잘못이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데클란은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낸다. 데클란은 리비의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에겐 그게 사랑이었다. 자신의 전부를 모두 내어주었으니까.

  데클란의 삶은 이때부터 지워진다. 이때부터는 리비를 통해 데클란의 이야기를 듣는다. 데클란은 수렁에 빠진다. 혼자 남는다. 리비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것이었다며, 10대의 도움 요청을 거절한다. 데클란의 전부를 자신의 전부로 바꿔낸다.

 


- 일어난 일은 나는 달린다, 나는 달린다, 달려 나간다, 밖으로, 이 공간 밖으로.

 데클란의 삶은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였을까.

 관객과의 대화 자리를 위해 데클란은 ‘난생처음’ 극장으로 향한다. 이때의 데클란에게 리비가 알려줬던 세상은 사실 다 가짜였다. 공공과 국립, 그리고 사설 기관의 차이를 그때의 데클란이 알 리가 없다. 그렇게 알려준 사람이 잘못 알려준 거라고 했다. 처음이라서요, 라는 말을 연신 반복하는 데클란을 보며 조바심이 인다. 과연 그는 하고자 하던 말을 리비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극장에 입장하기까지의 데클란의 여정은 험난하다. 늘 객석에 관객으로 앉아있는 내가 하는 예매, 예매확인, 표를 수령하고 자리에 앉아 극을 기다리는 이 모든 과정이 데클란에게는 벅차다.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자신역할의 배우 또한 낯설다. 내 가족들이 나오는데, 내가 있는데, 나는 아니다. 


- 마지막 장면은 없습니다.

 데클란은 절박했다.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앞으로 머무를 곳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 극이 끝났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이제는 예전과 같이 들어주지 않는 리비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칼을 선택한다. 솔즈베리 언덕에서 보던 수많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존재하려는 방법으로.

데클란의 선택은 그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극장 밖으로, 리비가 정해놓은 그 결말 밖으로. 데클란은 객석에 앉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극이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때도 사실은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서 이 극의 마지막 장면은 없다고.


- 어떻게 진짜가 이렇게 가짜처럼 보일 수 있는지.



 서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데클란과의 기억을 되짚어 나가는 것 또한 좋았다. 리비가 서술자로 등장해 극을 이끌어 나가며 끝까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점 또한 좋았다.

 그러나 수많은 욕설로 표현된 빈민층 10대의 언어, 윤리와 책임감을 내던진 베드씬과 남겨진 데클란의 자해장면을 보며 마냥 이 극을 좋아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번호를 바꾸고, 데클란의 개입을 거부한 극을 올린 리비에게 사실 윤리적 성찰은 바라지도 않았다. 창작자는 직업 윤리를 스스로 버렸고, 자신의 양심도 버렸다. ‘창작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위해 데클란의 삶은 무대 위의 시간이 끝난 후로 미룬 리비.

 극 속 ‘리비의 마우스피스' 연극은 발언권을 빼앗긴, 삶을 송두리째 갈취당한 사람의 마지막 비명과 같은 그 '목소리'라서 계속 마음에 걸린다.

 데클란이 듣고 싶던 말, 하고 싶던 말은 분명 괜찮다는 말이었으리라. 끝끝내 스스로 집어던지고 파괴하게 되는 그 말. 데클란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솔즈베리 언덕에 있다.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데클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리비의 것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극이 끝난 지금, 내가 아닌 데클란에게 묻는다.

 괜찮아, 꼬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