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물의 생의 궤적을 따라가는 작품을 좋아한다. 성장하는 것도 좋고, 액자식 구성으로 회상하는 것도 좋다. 인물이 겪는 사건들과 그로 인해 수반되는 감정들을 같이 훑을 수 있어서인데 제인이 딱 그랬다. 제인의 선택을 나는 반드시 응원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사라는 10살인 제인을 증오에 가까운 미움을 가지고 키우고(쓰는 건 키우는 거지만 사실 사라는 누군가의 생의 흔적을 떠안고 살아내고) 사촌과 동등하게 다툴 수 없었지만, 괴롭힌 가해자가 된 뒤 징벌방인 붉은 방에 갇힌다. 외삼촌이 돌아가신 후 아무도 머물지 않았던 방. 그 방에서 귀신을 본 거 같다며 발작을 일으키고, 그런 제인을 감당하지 못한 사라는 제인을 자선학교에 보내버린다.


"지옥은 없어"


로우드 자선 학교는 제인이 처음으로 만난 '커다란 세계'였다.


브로클허스트목사가 제인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의자에 올린 후 '사탄'이나 '악마'의 자식이라고 공표한다. 어린아이의 세계에 매우 잔인한 벌인데 이 소리를 듣고서 비참해하고, 괴로워하는 제인에게 웃어주는 한 사람. 아이들은 멍청하지 않다 말을 건네고, 한 시간 동안 의자에 올라가 모두의 시선을 받는 '형벌'을 받은 제인의 다리를 주물러주고 물을 건네는 사람.


한 인물이 대비되는 극단의 지점에 있는 인물들을 연기해서 더 명확하게 캐릭터가 대비된다.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냉담한 사라 외숙모를 볼 때면 어떻게 저 어린애한테 저렇게까지 하는 미운 연기를 할까.. 싶고, 꼬장꼬장한 브로클 허스트 목사를 보여주는 우연 배우는 무척 얄미웠다. 헬렌을 연기하는 우연 배우는 우연 헬렌은 너무 맑고,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또 신성한 부분마저 가지고 있다.


제인에게 헬렌은 로우드 학교 안에서 만난 빛, 혹은 구원에 가까운 인물인 것 같다. 자신의 결점으로(사실 그게 진짜 결점이었을까) 선생님들이 화내는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내세의 영원한 삶은 오로지 천국에만 있다고 믿으며 지옥은 없다고 말하는 헬렌이 신기했다. 부당한 일과 사실상 학대를 당하면서도 선을 믿고 신을 믿고, 이곳의 고통은 잠시일 뿐. 죽기 전 제인을 만나 다행이라고 말하는 다정한 목소리로 건네는 마지막 인사에 모질었던 우연사라를 잊어버렸다.


사람의 사랑에 집착한다고 헬렌이 말하는데(이런 뉘앙스였는데 정확한 대사는 모르겠다) 외숙모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던 시간을 제인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헬렌에게서 관용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가진 의미를 배우게 된다.


"잘 자요, 안녕 내…."


원작의 로체스터는 30대 후반의 (아마도)추남에 가까운 운동가였기에, 우연 로체스터가 나오는 순간 아득해졌다. 보이는 겉모습이 너무나도 완벽하고 멋져서. 그래서 제인 걔랑 살아라! 하고 자꾸 마음속으로 외쳐버렸으니까. 아니 아무튼.. 비밀을 감춘 인물을 연기하는 정우연에게 심장 한쪽을 내주었는데 아니 이건 이거고.


처음에 제인이 로체스터가 누군지 모른 채 이야기를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변하는 우연 로체스터의 표정이 좋았다. 로체스터와의 만남부터 굵직한 사건과 대사들은 버리지 않으면서, 제인과 로체스터의 관계를 풀어나가는데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로맨스가 존재하지만 직접적으로 정말 그들에게 정말 그런 관계가, 애정이 존재하긴 했던 건가? 하고 의심하며 극을 보고 있었다.


'잘 자요, 내….' 그가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더니 황급히 내 곁을 떠났다.
제인 에어 (상) 샬럿 브론테 - 열린책들 세계문학 165


책에서 좋아하는 부분을 무대 위에서 보게 되는 건 굉장히 감격스러운 부분이었다. 홀로 남겨진 채 자신의 감정을 고민하는 제인이 로체스터가 떠난 뒤 이렇게 부각되게 되다니.. 로맨스가 있긴 하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에게 주는 선물상자 이야기를 할 때도 그렇고 로체스터의 시선 끝에는 언제나 제인이 있는데 그 시선을 제인이 절대 알아채질 못한다.


제일 궁금했던 건 로체스터의 집시 노파연기 후 본인으로 돌아올 때의 극적 장치나 효과였는데, 이건 연극이라서 배우가 관객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던 나의 기대였던 것으로.. 진아 제인은 집시 노파를 마주하고서 이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함으로 이 부분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가서 와인을 가져다 달라는 로체스터의 부탁을 받고 응접실이 된 서재(?)로 돌아가 쏟아지는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와인을 잔 마시고서 의기양양해서 하는 진아제인을 보며 사랑스러움과 뿌듯함을 느꼈다. 로우드 자선학교에서 쏟아지던 시선에 괴로워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당당해진 모습.


메이슨이 베르타에게 공격당해 메이슨을 간호할 때 제인과 로체스터는 둘만의 비밀을 만듦과 동시에, 로체스터에게 베르타가 있다는 그 비밀을 철저하게 감추게 된다. 이 장면은 흰 천에 피를 묻힌 것으로 메이슨을 대신하고, 천을 제인이 날리며 메이슨이 새벽에 먼저 떠났다고 말하는 로체스터의 목소리를 제인이 듣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은데. 2인극에서 인물을 너무 세련되게 날려(..)버리는 것 같아서 기억에 남았다.


"난 지옥에 가겠지"


어린 시절을 내내 괴롭게 만든 외숙모임에도 아프다는 이야기에 제인은 다시 게이츠헤드로 간다.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곳으로. 사실은 생의 지옥과 같았던 곳으로.


사실 극의 초반부(아마도 1막)의 사라는 너무할 정도로 제인을 괴롭히는데, 후반부에 가면 어린아이 넷(그런데 그중 하나는 남편 동생의 아이)을 혼자 키우게 되어 얼마나 괴로웠는지. 죽기 직전 제인에게 털어놓는데 이때 우연사라의 무너짐이 마음 아팠다. 그래서 자꾸 괄호를 만들어 부연설명을 하게 된다.


분명 제인보다 크고 단단해서 세상 모든 것에서 제인을 떼어놓으려 하는 것 같았는데.. 물론 실제로도 사라는 '제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 선언하며' 제인의 가정교사 일을 알리는 편지에도 냉담하고, 제인의 유일한 혈육인 숙부의 편지에 제인이 죽었다 답장하면서 제인을 철저하게 혼자인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나 사라는 자신의 남편이 죽을 때 제인을 버리지 않겠다는, 스스로는 저주에 가까운 맹세를 하고 그 맹세를 이행하지는 못했다. 그의 귀신을 보며 붉은 방에 사실 본인이 갇힌 거나 마찬가지인 삶을 살았다. 제인은 나왔지만 자신은 나오지 했던 그 방에.


이 고백을 하는 사라의 보이지 않았던 생이 너무 불쌍했고, 그런 사라를 외숙모라 부르며 용서하는 제인을 존경했다.


"이별이 왜 필연적이지?"

쏜필드로 돌아오는 길에 로체스터를 도운 제인은, 의문의 불이 난 밤 역시 로체스터를 구한다. 로체스터는 두 번이나 자신의 생명을 구한 요정(이라 쓰고 제인이라 읽는다)에게 사랑을 느낀다. 근데 이게 사랑이 맞나 싶은 지점인 게 베르타는 로체스터에게 저주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운명에 이끌려, 하지 않아도 되는 맹세를 하면서 자신의 생을 스스로 저주의 구렁텅이로 집어넣는다.

편안해야 할 집은 베르타와 이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인해 끝없는 악몽에 가깝고, 그는 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그 모든 것을 외면하는데. 그 가운데 이 집에서 자신을 웃을 수 있게 하고, 구원한 건 제인이니까. 이건 필연에 의한 사랑이고, 제인은 안정을 원하는 로체스터의 피난처였다.


왜 이 시기의 작품들의 청혼은 거의 망한 것에 가까운가(..) 남성은 왜 이렇게 오만하게 나오는가(..)에 대해 망한 것 같지만 망하지 않은 청혼 장면을 보며 생각했는데, '동등'한 것이 키워드였다. 제인은 로체스터에게 함께해달라는 말을 듣고 몹시 화를 낸다. 예비 신부가 있는데 정부 역할을 해달라는 거여서 우리는 동등하다 외치는데, 아마 여기에서 로체스터는 제인의 유연함과 다름에 기대려고 했던 것 같다. 이 장면을 글로 쓸려니까 뭔가 자꾸 웃음만 나는 게... 이 부분은 직접 봤으면 좋겠다.

제인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보석을 주고 싶어 하는 로체스터는 물질로 제인을 묶어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의 모든 결함은 숨길 수 있으며, 제인 만큼은 자신에게 돌을 던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게 분명하다.


언제나 태양이 뜨는 것 같은 붉은 방에 브레타를 속박해 둔 것처럼, 제인은 빛나는 보석과 같은 사랑으로 그 눈을 가려버리면 영영 모를 거라고. 로체스터는 제인과 유럽으로 긴 신혼여행을 떠나서 1년 후 집에 대한 비밀(베르타의 존재)을 이야기해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제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형태로 그의 입으로 듣게 된다.


결혼식 전날 밤. 제인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로체스터가 하자는 대로 이끌려 가는데, 사실 내내 집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웃음소리로 관객은 물론 제인 역시 무언가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이 집에, 혹은 그 결혼식에 무언가 있으리라는 것.


베일을 꺼내두고 잠이 든 제인의 곁으로 붉은 드레스 혹은 가운을 입은 베르타가 다가온다. 제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제인은 갈기갈기 찢어진 웨딩 베일을 발견하고 결혼식에 베일을 쓸 수 없게 된다. 베르타가 제인의 베일을 찢었던 것을 로테스터에게 설명하지 않지만, 사실 로체스터는 이 모든 일을 알고 있다. 더 이상의 설명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메이슨의 등장으로 중단된 결혼식.
어쩐지 불안했던 것들은 결혼을 알리는 제인의 편지로 모두 현실이 되는데, 모든 것이 밝혀지자 오히려 담담하게 베르타를 소개하는 우연 로체스터가 너무 황당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일어난 부도덕한 일을 정당화하는 자세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그 순간이 올 줄 알아서 준비했던 사람 같았달까.
대담하고 당당했던 제인은 자신을 하나의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해주던 쏜필드를 떠나기로 한다.


"나는 황야로 걸어 들어갔어."


안락했던 집, 그리고 사랑을 쏜필드에 두고 제인은 황야로 떠난다. 비참하고 괴로운 길을 홀로 걸어가다 무너져 흐느낄 때, 진아 제인이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서 아직은 살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순간 나도 같이 울었다.

이때의 음악사용과 제인이 황야로 떠나는 길을 보여주는 조명은 극호였다. 어두움 속에 빛으로 이루어질 길을 따라가야 하는, 그리고 그 길밖에 없는.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극적인 효과랄까. 이 장면은 '굉장히 종교적'으로 연출된다.


목사가 등장하고 제인은 로우드 학교에서 성서의 교리에 관해 공부하고, 자주 기도하는 장면들이 나오는 만큼 이 극은 종교적인 부분을 배제 할 수가 없다. 성경 속에서 황야는 주로 고난과 고통, 시련의 공간으로 그려지고, 제인에게 펼쳐진 황야 역시 그랬다.

평안하게 사랑하는 로체스터와 남은 생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제인 앞에 브레타와 붉은 방에 나타났고, 마차에 짐까지 놓고 내리면서 제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성경은 그 황야에서 나오는 인간을 위해 '천국'을 예비한다. 제인에게 천국은 리버스 목사와의 만남이었을까, 아니면 그 후의 공간이었을까. 헬렌이 있는 그 곳일까.


"내 영혼은 여전히 나의 것이었어."


제인이 정신을 차렸을 땐 목사관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도피의 공간을 찾았고, 제인은 여기서 천사 같은 다이애나를 만난다. 다이애나는 상냥하고 다정한, 약간 어리숙해 보이지만 제인을 응원하는 여성캐릭터이자제인과 끝까지 함께하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어책을 거꾸로 집어 들고 읽지 못하는 다이애나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캐릭터였다. 독일어를 알려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제인은 리버스 목사에게 힌디어를 배울 생각은 더더욱 없었을 텐데.


리버스 목사님.. 목사님은 사실 원작에서도 미친 사람인가 싶은데, 극 속에서는 진짜 앞뒤 다 자르고도 정말 미친 사람 같았다. 이 부분을 극대화하니 어설프게 꿇는 무릎과 그의 달변은 무거웠던 극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 같았다.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나기도 했고, 이쯤 되니 원작에 그만 얽매여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쉬운 건 리버스와 로체스터의 이미지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데.. 리버스와 브로클허스트는 분명한 경계선이 있는데, 리버스와 로체스터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성격은 다른데 표현이 비슷해 보였달까. 아직 프리뷰인 만큼 리버스의 의상에 좀 더 '성직자'스러운 부분들을 추가하거나 구분되게 해줬으면 좋겠다.


확실한 신념과 목표가 이끄는 사람은 상대의 감정이나 자신의 감정은 정말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서. 달변가이자 웅변가여서 뚝딱거리며 하는 산책과 청혼 아닌 청혼에도 제인이 아주 잠시 고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야, 제인! 하고 외치던 제인의 목소리에 나도 제정신이 돌아왔었다. 사랑 없는 결혼은, 타인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사실 이 부분은 결말의 흐름을 사실상 미리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떠나라, 제인. 살아라, 제인.
그 베일을 쓰지 마.


제인은 아무튼 달변가(..)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숙부님에게 편지를 보내고서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쏜필드로 향한다. 사실 이 부분까지도 원작의 결말이 바뀔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 다시 돌아가는 것은 결국 로체스터에게로 향하는 길이었으니까.


로체스터는 제인과 유럽으로 긴 신혼여행을 떠나서 1년 후 집에 대한 비밀(베르타의 존재)을 이야기 하려 했던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1년 후 제인은 이미 밝혀진 진실 앞에 불에 타 폐허가 된 쏜필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이야기하지 않고 감춰두었던 베르타의 이야기를 꺼낸다. 관객에게, 그리고 화자이기도 한 자기 자신에게.


제인에게 붉은방이 가진 의미는 악몽이자 생의 저주 같은 것인데. 트라우마이기도 하고. 베르타는 제인이기도 했고, 제인의 거울이기도 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진취적인 선택을 하던 제인에게 베르타의 공간인 붉은 방은 한계를 뜻했다.


베일을 쓰면 안 돼, 가 아니고 쓰지 말라고 말하는 지점이 의외였다. 베르타가 제인의 그림자, 혹은 제인 자신이라는 부분이 참 서글펐다. 베르타가 과연 정말 제인에게 말을 걸었을까, 혹은 걸 수 있었을까.


베르타의 목소리는, 베르타가 건넨 말은 '제인 스스로 선택'을 하라는 의미였다. 베르타는 제인이 작은 공간 안에 갇혀있지 않길 원했다. 제인은 베일을 쓰지 않기로 했고, 베르타는 그 방과 자신을 파괴한다. 제인이 영원히 떠날 수 있도록, 과거를 반복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도록.


제인의 회상은, 과거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극이 시작할 때 제인이 왜 그림을 그려보자고 했던 걸까, 했는데 제인은 마데이라에서 그림 교실을 열어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생을 살고 있었다. 오래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다이애나를 친구로 부를 수도 있었다.


*

붉은 방부터 결말까지가 원작과 가장 다른 부분인데, 이 부분이 완벽한 고전의 재해석이었다.

극을 보고 나온 당장은 굉장히 미묘했다. 원작과 가장 달랐고, 그 집에서 몰래 도망쳐 나오면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베르타를 만나기 위해 다시 그 방으로 간다고? 하고 꽤 여러번 되물었다. 원래 결말처럼 로체스터와 다시 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제인이 기도를 하고 있긴 한데, 분명 종교적 영향을 많이 받긴 했지만 결국 모든 건 제인 스스로 이뤄냈다. 응답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제인은 분명 그 순간에 '혼자'다.
원작의 종교 비판적 자세는 배제되지 않았고, 성장하는 제인의 모습도 삭제하지 않았고,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았고, 모두를 이름으로 불렀다.

원작의 제인은 머무를 곳, 집, 가족과 사랑을 열렬하게 원했다. 자신을 불가피하게 밝혀야 하는 상황에는 제인 엘리엇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에어'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에 제인은 강한 확신이 있었는데, 연극의 제인은 그저 제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인물들은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려서 중간에 내가 내용을 잘못 알고 있나? 하고 고민했었다.

이 모든것과 결말을 바꿔낸 지점이 사실 매우 신기했다. 18세기 작품을 21세기로 가져오지만, 제인의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 그리고 고전을 재해석하는 것. 이건 재해석한 창작자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받아들이는 관객인 내가 유연해야만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극이 진행될 수록 내내 제인은 말했다.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제인이 아니라고. 시대 통념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이 극 속의 제인은 원작의 제인과는 완벽하게 다르다는 것.

제목부터 제인에어가 아닌 '제인' 이었으니까.

그래서 가능하다면 원작을 읽지 않고 극을 봤으면 좋겠다. 제인 에어와 제인은 다른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극을 보는 내내 원작의 '이 부분'이 없네, 하면서 보던 건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포인트다. 모르고 봤으면 정말로 제인의 삶(이라고 쓰고 어떤 과정이라고 읽는) 자체를 즐기고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책으로 8시간 정도 읽었던 텍스트를 2시간이 조금 안되는 시간 동안 무대 위 작품으로 보는 거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저번 후기에 '마우스피스를 처음 보고 나왔을 때는 끝없는 자기 복제의 메시지만을 전하는구나, 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서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 극은 지금껏 주던 메시지를 전복시키는 극이었다. 괜찮아지지 않을 거고, 그 목소리는 사실 닿지 않을 거'라고 썼는데. 두 번째 관람에서는 이 극이 기존 메시지의 전복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전달하려고 하는 그 '목소리'와 '이야기'가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 잘 만든 거라서 그래. 정말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를 팔거든.


데클란이 자신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시안에게 하는 말은, 이 극 전체를 관통한다.
리비가 극장에, 무대 위에 올린 것은 가짜였다. 가짜를 팔아 리비는 진짜 삶을 이어 나간다.

데클란은 리비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리비가 복제해낸 데클란 같았다.
어느 순간까지는 데클란인데, 시안을 데려오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던 지점부터는 아니었다.

동화책 속 그림같다던 리비의 말을 언덕에서 데클란이 그대로 반복하는 순간, 이건 데클란의 언어를 사용하고 싶어하는 리비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워져 버린 데클란, 지문처럼 행동하는 데클란.

처음에 리비가 정해두었던 결말이 데클란의 분노를 일으켰던 이유는, 실제 삶과 다르게 '스토리 텔링의 법칙' 때문에 '극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인 것 같았다.


- 첫 번째 아이디어

데클란이 칼을 들고 저 말을 하는 순간, 이건 완벽하게 리비의 마우스피스라는 것을 알았다.
무대 위에 올라간 남자를 그린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을 뿐, 실제로 데클란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데클란은 무대에서 쓰러지지 않았다.

이건 리비의 첫 번째 결말이었다.

자신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던 언덕까지 뛰어 올라가 그 공간에 다른 이들이 올라오는 걸 본 게 두 번째 결말 같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데클란. 그게 정말 도움인지 모르겠지만.


- 가짜가 이렇게 진짜처럼 보일 수 있는지.

어제 대사가 진짜랑 가짜 순서 바뀐 거 같은데 너무 이게 맞았음.

옳은 일을 한다는 리비의 기만은 가짜 인생을 전시하고, 이걸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데클란의 언어로 극을 쓰려다가 데클란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인물을 만들어 낸 사람. 리비퀸.

데클란의 목소리를 흉내 낸 가짜는 절대 진짜 인생을 담아낼 수 없다.

데클란의 삶인 이 이야기가 자신의 것이라 말하던 리비.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 데클란에게 '내' 이야기라고 답했던 이유는, 너무나 기만적이게.
사랑하는 데클란은 극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의 이야기야, 라고 대답하고 싶었던 것 같다.


- 나는 작가다. 나의 일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작가였다던 리비가 자신이 작가라고 말하는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데클란의 진짜 인생은 이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리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극은 이야기이다. 마우스피스는 데클란의 삶을 재조립하고 끝내는 파괴하려 했던 리비의 이야기이다. 누군가 했던 말처럼 사랑 이야기다. 자신의 사랑 이야기. 자신의 심장이 데클란과 닿았다고 믿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




- 관객들이 그 이야기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면 안돼
연극열전은 대본집을 내주세요. 이 부분 대사가 기억 안 나니까


이 극속에 언제쯤 나를 들어가게 하더라, 하고 곱씹어본 적이 있었는데 어제 정확히 알았다.

데클란은 모자를 뒤집어쓰고 극장으로 들어와서 뒤를 돌아서 객석을 보면서 당신들 사이에 앉았다고 할 때.
그리고, 리비가 '여러분이 내게 박수를 보낸다'고 할 때.
그 두 대사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객석의 당신들도 참여했다고, 이 기만은 혼자서 벌인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거였다.

극을 보면서 데클란을 동정하고, 리비의 실패를 내 것처럼 여기다가 데클란이 칼을 든 순간부터는 아무 '판단'을 할 수 없다.
누군가의 착취를 사랑이라고 포장하는 내가 뭐라고 판단을 하겠는가, 나는 이야기를 보고 쓰는 보통 관객일 뿐인데.


 

 

 

 연극열전의 극들이 해왔던 말이 있다. “괜찮아질 거에요. 길을 잃은 사람들. 그 목소리가 닿을 거에요.” 가능성과 긍정적 기능으로만 점철된, ‘위로’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대사들을 보며 이제 극은 시대성을 포기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마우스피스를 처음 보고 나왔을 때는 끝없는 자기 복제의 메시지만을 전하는구나, 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서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 극은 지금껏 주던 메시지를 전복시키는 극이었다. 괜찮아지지 않을 거고, 그 목소리는 사실 닿지 않을 거라고.


- 마우스피스! 진짜 작품처럼 제목을 붙여준 거죠!

 극의 초반부 리비가 데클란을 다시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데클란은 가만히 듣고 있다. 10대 남성이 40대 여성의 인생얘기를 들으며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앉아 경청한다는 연출 자체를 일단 믿을 수 없으나, 데클란은 리비같은 사람 역시 실패했다는 데서 안도감을 얻은 듯했다.

 리비를 통해 미술관에 가게 되고, 예술적 재능에 대해 알게 되고, 아주 잠시 다른 인생을 꿈꾼다. 데클란은 자신의 이야기가, 자신의 삶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다는 것에 들떠있었다고 말한다. 늘 제자리인 인생. 미술관 벽에서 본 괜찮아질 거라는 말로, 점점 나빠지는 현실에서 등을 돌린다.

 


- 나를 연기한 새끼가 나서서 이건 아주 메타적이래요.

 데클란의 역을 맡았던 배우의 말을 전하는 데클란이 하는 말은 ‘메타적’이었다. 그들에겐 데클란의 인생은 실제와 가짜 사이의 경계 같은, 오로지 극에서 연기로만 올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극은 연극을 만들어 연극을 올리는 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리비가 데클란을 처음 만나게 되었던 만남과 함께 리비가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함께 시연된다. 극이 무대에 올라가게 되는 후반부에는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메타적이라는 말로 데클란의 인생을 정리할 수는 없다. 그는 극 속에 분명 실존했던 인물이다.

 


- 저 위에 올라가 있는 건 당신의 피와 살입니다. 당신의 심장, 영혼이죠.

 타인과의 대화를 소설에 그대로 실은 최근의 모 작가 일과 겹쳐 유독 불편했다. 타인의 역사를 자신의 작품에, 인생에 가감 없이 끌어들인 ‘발화자’의 모습을 한 리비가 불편했다.

 해외 리뷰에서 데클란과 리비사이에 이상한, 혹은 불안정한 우정이 싹튼다는 표현을 읽었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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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strange friendship blossoms, and Libby begins to write again; but since Declan is her subject, and her new play composed largely of his words, an increasingly tense and desperate struggle ensues over this middle-class appropriation of working-class experience, culminating in a devastating showdown at the Traverse.

 

https://www.scotsman.com/arts-and-culture/theatre-and-stage/theatre-review-mouthpiece-traverse-edinburgh-191831

 

- As they form an uneasy friendship, complicated by class and culture, Libby spots an opportunity to put herself back on track, and really make a difference.

 

https://sohotheatre.com/shows/mouthpiece/

사랑인지 보살핌인지 연민인지 동정인지. 무엇으로부터 촉발된 지 모르를 10대 남성과 40대 여성의 베드씬. 낮은 조도의 조명과 아무런 음향효과 없이 표현된 이 장면은 꽤 길다.

 리비에 대한 호감이 사라지고, 거부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일로 리비는 데클란을 통제한다. 자신의 잘못이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데클란은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낸다. 데클란은 리비의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에겐 그게 사랑이었다. 자신의 전부를 모두 내어주었으니까.

  데클란의 삶은 이때부터 지워진다. 이때부터는 리비를 통해 데클란의 이야기를 듣는다. 데클란은 수렁에 빠진다. 혼자 남는다. 리비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것이었다며, 10대의 도움 요청을 거절한다. 데클란의 전부를 자신의 전부로 바꿔낸다.

 


- 일어난 일은 나는 달린다, 나는 달린다, 달려 나간다, 밖으로, 이 공간 밖으로.

 데클란의 삶은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어디까지가 진짜였을까.

 관객과의 대화 자리를 위해 데클란은 ‘난생처음’ 극장으로 향한다. 이때의 데클란에게 리비가 알려줬던 세상은 사실 다 가짜였다. 공공과 국립, 그리고 사설 기관의 차이를 그때의 데클란이 알 리가 없다. 그렇게 알려준 사람이 잘못 알려준 거라고 했다. 처음이라서요, 라는 말을 연신 반복하는 데클란을 보며 조바심이 인다. 과연 그는 하고자 하던 말을 리비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극장에 입장하기까지의 데클란의 여정은 험난하다. 늘 객석에 관객으로 앉아있는 내가 하는 예매, 예매확인, 표를 수령하고 자리에 앉아 극을 기다리는 이 모든 과정이 데클란에게는 벅차다.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고,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자신역할의 배우 또한 낯설다. 내 가족들이 나오는데, 내가 있는데, 나는 아니다. 


- 마지막 장면은 없습니다.

 데클란은 절박했다.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앞으로 머무를 곳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 극이 끝났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이제는 예전과 같이 들어주지 않는 리비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 그는 칼을 선택한다. 솔즈베리 언덕에서 보던 수많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존재하려는 방법으로.

데클란의 선택은 그 밖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극장 밖으로, 리비가 정해놓은 그 결말 밖으로. 데클란은 객석에 앉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극이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때도 사실은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서 이 극의 마지막 장면은 없다고.


- 어떻게 진짜가 이렇게 가짜처럼 보일 수 있는지.



 서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데클란과의 기억을 되짚어 나가는 것 또한 좋았다. 리비가 서술자로 등장해 극을 이끌어 나가며 끝까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점 또한 좋았다.

 그러나 수많은 욕설로 표현된 빈민층 10대의 언어, 윤리와 책임감을 내던진 베드씬과 남겨진 데클란의 자해장면을 보며 마냥 이 극을 좋아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번호를 바꾸고, 데클란의 개입을 거부한 극을 올린 리비에게 사실 윤리적 성찰은 바라지도 않았다. 창작자는 직업 윤리를 스스로 버렸고, 자신의 양심도 버렸다. ‘창작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위해 데클란의 삶은 무대 위의 시간이 끝난 후로 미룬 리비.

 극 속 ‘리비의 마우스피스' 연극은 발언권을 빼앗긴, 삶을 송두리째 갈취당한 사람의 마지막 비명과 같은 그 '목소리'라서 계속 마음에 걸린다.

 데클란이 듣고 싶던 말, 하고 싶던 말은 분명 괜찮다는 말이었으리라. 끝끝내 스스로 집어던지고 파괴하게 되는 그 말. 데클란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솔즈베리 언덕에 있다.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데클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리비의 것으로 치환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극이 끝난 지금, 내가 아닌 데클란에게 묻는다.

 괜찮아, 꼬맹이?



킬롤로지 (KILLOLOGY) 



알란 - 이석준 / 폴 - 김승대 / 데이비 - 장율




- 너 기억나? 그 개. 


데이비와 알란이 공유할 수 있는 가장 큰, 혹은 유일한 기억. 메이시. 


알란의 상상 중에 어쩌면 가장 나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데이비일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믿지 못하고 '그 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아닐까. 


데이비가 메이시의 이름을 정확히 말하니까 안도하는 듯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내가 만들어 낸 내 데이비가 맞구나, 나의 데이비구나. 

하는 느낌이라서 만감이 교차했다. 



- 별을 향해.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데이비가 '별을 향해'라는 대사를 할 때, 무심코 다른 배역들을 봤는데. 

알란은 여전히 상상 속 데이비를 보고 있었고, 


폴은 별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향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별을 향해 발을 뻗었다. 


공평하지 않은 삶에서 자전거의 살에 박힌 플라스틱 다이아몬드만 반짝거릴 뿐이었던 데이비. 

세상 그 모든 가능성을 손에 쥐고 태어나 별을 향할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었던 폴. 


마지막까지 그 둘의 대비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PAUL



폴이 아버지에게 가진 감정을 사실 '애증'이라는 단어는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단어만큼 가장 가까운 느낌의 말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이 극에서 폴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사실은 더 굉장하구나, 를 깨달았다. 


3대에 걸치는 폭력의 대물림과 연대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현실적으로 풀어내는 사람. 


에단에게 손을 올렸다가 내렸을 때, 폴이 진짜로 에단을 때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집트에서의 자신과 겹쳐 보이는 그 모든 순간 아버지의 마음을 분명 깨달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의 아버지가 말한 연대의 의미를, 누군가의 슬픔을 조롱한다는 것을. 

아버지이자 보호자, 사회 구성원들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하는 그 연대를. 


폴은 에단을 보내며, 보호자이자 책임자라는 말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이들을 조롱한다는 것을. 

끝까지 아버지가 말한 연대를 하지 못하는 게 씁쓸했다. 




폴이 아버지가 죽을 때 하는 그 대사들이, 너무나 많은 접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상실의 감정에, 아버지의 부재라는 그 감정에 울컥한 배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울컥해서. 


폴이라는 인물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감정으로 설득되어 버린 이 날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현실의 데이비와 알란의 상상 속 데이비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알란의 상상이 슬퍼지고, 공평을 묻는 망가지기 직전의 데이비가 너무 아프다. 


데이비의 행동이 이해되고, 데이비가 처한 상황이, 그 사회가 극과 현실이 다르지 않아서 너무 씁쓸했다.



킬롤로지 (KILLOLOGY) 



알란 - 이석준 / 폴 - 이율 / 데이비 - 장율




- 이게 어떻게 공평해. 



데이비의 입에서, 알란의 입에서, 폴의 입에서 공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은 정말 다르다. 


아무것도 받을 수 없던 데이비, 

미친게임을 만든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미친[각주:1]알란.

모든 게 주어져 출발점이 달랐음에도 매번 틀린 답을 내놓던 폴. 


주어진 것이 다른 삶. 

아무것도 받을 수 없던 사람 

줄 수 없던 사람과 

모든 걸 받았으나 증오만 남은 사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삶이. 

미친 사람의 단죄가. 

주어졌음에도 알지 못하는 삶이. 

도대체 어디가 공평해. 


데이비가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하는 것도,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를 자신의 나이 반만 한 아이에게 지어주는 것을 보고 하는 생각도. 


데이비의 마지막이, 데이비가 말하는 '공평'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누구에게도 삶이 공평하지 않기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아빠' 라는 말로 아빠가 될 수 없었던 폴과 알란 



PAUL 



- 혼자서, 어둠 속에. 


폴은 언제나 아버지로 인해 질문하고 답을 얻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은 어둡고, 크고, 그런데 거기엔 별이 있고. 자신은 별에 갈 수 있을 거라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고. 

자신에게 늘 질문만 던지고, 만족하지 못하던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곁에 붙들어둔다는 느낌보다는, 그 긴 생을 어떻게든 버팀목으로 존재하라고. 

평생 그에게 답을 구했던 것처럼, 언제나 그렇게 존재하라고. 


그렇게 했는데 아버지가 혼자서 어둠 속에 남은 것을 보고, 자신도 결국 확신 없이. 

자신을 잡아주는 손 없이 그곳에 남는 건 아닐까 하는. 


그래서 자신을 붙잡아줄 존재로 미성숙한 존재인 아들을 데려오고. 

그를 걱정하는 폴에게서 알란에게 '이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알란의 걱정을, 알란에게 데이비가 어떤 존재였는지. 

혹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정확히 아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닐까. 



ALAN 



- 나 그 애 아빠야 


아빠라고 불려서 아버지가 된 사람, 

자신을 그 애의 아빠라고 칭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던 사람.



- 아빠 지금도 차에 설탕 세스푼 넣어요? 


오래된 상처를 어떻게 불멸의 것으로 만들어주는지[각주:2] 알란은 알고 있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데이비가 '기억'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말을 돌리는 알란. 

처음으로 상상 속 데이비와 처음으로 대화를 했던 건 아닐까. 

울먹이던 얼굴과 울음을 참아내려 입을 가리던 손이 계속 잔상처럼 남아있다.


알란이 만들어 낸 그 어느 날의 데이비는 오랫동안 아빠를 보지 않았지만,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상냥한 아들이었다. 


그가 해주지 않은 것들 그 이상을 기억하는 데이비. 



- 내가 널 안아줄 수는 없어도 네 아빠야. 


이 대사가 자꾸 목에 턱턱 걸린다. 


재판 장면에서는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신념이 있어서 저렇게 된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상상 속 데이비와 마주하는 순간 데이비를 너무 사랑했고. 

사랑해주지 못한, 고통을 함께 하지 못했던 그 후회 때문에 저렇게 된 거구나 싶어서 마음이 너무 아파졌다.


데이비에게, 사람들에게 알란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겠구나.




*



프리뷰 기간이 지나고 제일 아쉬워진건 무대언어의 감소.

데이비의 목소리가 들릴때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관객이 헷갈리게 하는 그 장치가 강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애매모호함의 경계가 사라졌다.


그리고, 재판씬에서 의자를 넘어뜨리며 호소하던 알란이 그저 목소리만으로 공간을 채우는 것.

물론, 알란이 현실에서 그랬겠지만.

약간의 경각심 같은 게 들던 장면이었는데 그게 사라져서 아쉽다.

배우 디테일이었디...


그리고 데이비가 고문당하던 영상의 소리가 커진거.

그게 들리지 않아야, 어느 순간 잠깐 또렷해져야(폴이 정면을 볼때) 더 충격적이고 몰입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인물들의 대사가 들리질 않고, 그 영상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거 좀 아쉽다. 



  1. 알란의 대사를 빌려본다. 알란의 행위들은 상실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본문으로]
  2. P.39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본문으로]






킬롤로지 (KILLOLOGY) 


알란 - 김수현 / 폴 - 이율 / 데이비 - 장율




한 번 망가지면

그건 그냥 망가져 버리는 거고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마지막 남은 원망의 대상인 폴에게 제대로 된 위해나 복수를 하지 못하는 가여운 인간. 

누군가의 소중한 아이였을 폴이라고 생각해서 알란은 더 하지 못했다. 


결국, 복수도 실패하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한 실패와 실패만 남은 남자. 


'아빠'라는 말의 무게를 점점 알아가는 알란이 안타깝다. 


사랑스럽고 단단한 아이를 상상하는 알란이 가여웠다. 


다시는 자신의 손에 데이비의 손을 쥘 수 없을 텐데. 

데이비에게 더 나은 가능성, 나은 삶을 선물해줄 수는 없을 텐데. 





억지긴 해도 미소로 답해줘요. 

모든 게 다 괜찮아 질 거라는 듯이.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런 미소를.

이게 어떻게 공평해?

참을 수가 없었어요.




데이비가 너무 불쌍했다. 가여웠다. 


크고 까만 밤에서 어둠을 본 게 아니라, 반짝이는 별과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받는 폴.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별까지 갈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었던 폴. 

비탈길을 내려올 때 의지할 손이 있었던 폴. 

자신에게 애정을 담아 애칭으로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는, 그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폴. 


데이비가 자신의 '것'이라고 칭하는 건 무조건 적인 사랑을 주는 강아지 메이시. 

크고 까만 눈에서 비친 자신을 보고 있었을 데이비. 

창문을 타고 지붕으로 넘어갔을 때, 자신이 다쳤을 것을 걱정해 준 건 메이시뿐이었던 데이비. 

데이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보다 '야' 혹은 그 외의 욕들로 불리는 데이비. 



세상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 같은, 손을 잡아주고 미소를 지어주는 아빠가 있는 자전거의 주인. 


데이비는 받을 수 없던 미소, 가능성과 기회. 

할 수 없던, 될 수 없던 더 나은 사람. 





사실은 폴의 역할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감정 없는 서술자, 극의 진행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캐릭터. 


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극을 봤는데 폴이 생각보다 더 많이 중요한 캐릭터였다. 


킬롤로지 라는 게임을 만들게 된 생일 파티부터 상기되어있고, 과장되어 있어서 

가볍다, 는 느낌보다 '미쳐있다'는 느낌에 가까워서 사실 보는 동안 힘들었다. 


그런데 또 그 감정선이 알란이 복수를 할 때는 

알란의 감정을 전혀 이해할 생각이 없고 

이 상황을 면피하는 것에만 급급해져 있어서 

그의 배에 끌을 박아 넣는 알란의 마음을 백배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건 또 약간의 유머.




각 인물의 서사를 따라 사건을 나열하는게 고통스러운 극이다.


폴이 가진 것들을 영원히 가지지 못할 데이비에게 미안해서.

알란의 상상 속 데이비가 따뜻하고 다정할수록 데이비가 가질 수 없던 수많은 기회가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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