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롤로지 (KILLOLOGY) 



알란 - 이석준 / 폴 - 김승대 / 데이비 - 장율




- 너 기억나? 그 개. 


데이비와 알란이 공유할 수 있는 가장 큰, 혹은 유일한 기억. 메이시. 


알란의 상상 중에 어쩌면 가장 나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데이비일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믿지 못하고 '그 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 아닐까. 


데이비가 메이시의 이름을 정확히 말하니까 안도하는 듯 얼굴을 쓸어내리는데 

내가 만들어 낸 내 데이비가 맞구나, 나의 데이비구나. 

하는 느낌이라서 만감이 교차했다. 



- 별을 향해.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데이비가 '별을 향해'라는 대사를 할 때, 무심코 다른 배역들을 봤는데. 

알란은 여전히 상상 속 데이비를 보고 있었고, 


폴은 별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향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별을 향해 발을 뻗었다. 


공평하지 않은 삶에서 자전거의 살에 박힌 플라스틱 다이아몬드만 반짝거릴 뿐이었던 데이비. 

세상 그 모든 가능성을 손에 쥐고 태어나 별을 향할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었던 폴. 


마지막까지 그 둘의 대비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PAUL



폴이 아버지에게 가진 감정을 사실 '애증'이라는 단어는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단어만큼 가장 가까운 느낌의 말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이 극에서 폴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사실은 더 굉장하구나, 를 깨달았다. 


3대에 걸치는 폭력의 대물림과 연대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현실적으로 풀어내는 사람. 


에단에게 손을 올렸다가 내렸을 때, 폴이 진짜로 에단을 때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집트에서의 자신과 겹쳐 보이는 그 모든 순간 아버지의 마음을 분명 깨달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의 아버지가 말한 연대의 의미를, 누군가의 슬픔을 조롱한다는 것을. 

아버지이자 보호자, 사회 구성원들이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하는 그 연대를. 


폴은 에단을 보내며, 보호자이자 책임자라는 말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이들을 조롱한다는 것을. 

끝까지 아버지가 말한 연대를 하지 못하는 게 씁쓸했다. 




폴이 아버지가 죽을 때 하는 그 대사들이, 너무나 많은 접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상실의 감정에, 아버지의 부재라는 그 감정에 울컥한 배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울컥해서. 


폴이라는 인물을 영영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감정으로 설득되어 버린 이 날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현실의 데이비와 알란의 상상 속 데이비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알란의 상상이 슬퍼지고, 공평을 묻는 망가지기 직전의 데이비가 너무 아프다. 


데이비의 행동이 이해되고, 데이비가 처한 상황이, 그 사회가 극과 현실이 다르지 않아서 너무 씁쓸했다.



킬롤로지 (KILLOLOGY) 



알란 - 이석준 / 폴 - 이율 / 데이비 - 장율




- 이게 어떻게 공평해. 



데이비의 입에서, 알란의 입에서, 폴의 입에서 공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은 정말 다르다. 


아무것도 받을 수 없던 데이비, 

미친게임을 만든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미친[각주:1]알란.

모든 게 주어져 출발점이 달랐음에도 매번 틀린 답을 내놓던 폴. 


주어진 것이 다른 삶. 

아무것도 받을 수 없던 사람 

줄 수 없던 사람과 

모든 걸 받았으나 증오만 남은 사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삶이. 

미친 사람의 단죄가. 

주어졌음에도 알지 못하는 삶이. 

도대체 어디가 공평해. 


데이비가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하는 것도, 

자신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를 자신의 나이 반만 한 아이에게 지어주는 것을 보고 하는 생각도. 


데이비의 마지막이, 데이비가 말하는 '공평'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누구에게도 삶이 공평하지 않기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아빠' 라는 말로 아빠가 될 수 없었던 폴과 알란 



PAUL 



- 혼자서, 어둠 속에. 


폴은 언제나 아버지로 인해 질문하고 답을 얻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은 어둡고, 크고, 그런데 거기엔 별이 있고. 자신은 별에 갈 수 있을 거라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고. 

자신에게 늘 질문만 던지고, 만족하지 못하던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곁에 붙들어둔다는 느낌보다는, 그 긴 생을 어떻게든 버팀목으로 존재하라고. 

평생 그에게 답을 구했던 것처럼, 언제나 그렇게 존재하라고. 


그렇게 했는데 아버지가 혼자서 어둠 속에 남은 것을 보고, 자신도 결국 확신 없이. 

자신을 잡아주는 손 없이 그곳에 남는 건 아닐까 하는. 


그래서 자신을 붙잡아줄 존재로 미성숙한 존재인 아들을 데려오고. 

그를 걱정하는 폴에게서 알란에게 '이런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알란의 걱정을, 알란에게 데이비가 어떤 존재였는지. 

혹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정확히 아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닐까. 



ALAN 



- 나 그 애 아빠야 


아빠라고 불려서 아버지가 된 사람, 

자신을 그 애의 아빠라고 칭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던 사람.



- 아빠 지금도 차에 설탕 세스푼 넣어요? 


오래된 상처를 어떻게 불멸의 것으로 만들어주는지[각주:2] 알란은 알고 있었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데이비가 '기억'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말을 돌리는 알란. 

처음으로 상상 속 데이비와 처음으로 대화를 했던 건 아닐까. 

울먹이던 얼굴과 울음을 참아내려 입을 가리던 손이 계속 잔상처럼 남아있다.


알란이 만들어 낸 그 어느 날의 데이비는 오랫동안 아빠를 보지 않았지만,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상냥한 아들이었다. 


그가 해주지 않은 것들 그 이상을 기억하는 데이비. 



- 내가 널 안아줄 수는 없어도 네 아빠야. 


이 대사가 자꾸 목에 턱턱 걸린다. 


재판 장면에서는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신념이 있어서 저렇게 된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상상 속 데이비와 마주하는 순간 데이비를 너무 사랑했고. 

사랑해주지 못한, 고통을 함께 하지 못했던 그 후회 때문에 저렇게 된 거구나 싶어서 마음이 너무 아파졌다.


데이비에게, 사람들에게 알란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겠구나.




*



프리뷰 기간이 지나고 제일 아쉬워진건 무대언어의 감소.

데이비의 목소리가 들릴때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관객이 헷갈리게 하는 그 장치가 강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애매모호함의 경계가 사라졌다.


그리고, 재판씬에서 의자를 넘어뜨리며 호소하던 알란이 그저 목소리만으로 공간을 채우는 것.

물론, 알란이 현실에서 그랬겠지만.

약간의 경각심 같은 게 들던 장면이었는데 그게 사라져서 아쉽다.

배우 디테일이었디...


그리고 데이비가 고문당하던 영상의 소리가 커진거.

그게 들리지 않아야, 어느 순간 잠깐 또렷해져야(폴이 정면을 볼때) 더 충격적이고 몰입이 가능했던 것 같은데.

인물들의 대사가 들리질 않고, 그 영상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거 좀 아쉽다. 



  1. 알란의 대사를 빌려본다. 알란의 행위들은 상실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본문으로]
  2. P.39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본문으로]






킬롤로지 (KILLOLOGY) 


알란 - 김수현 / 폴 - 이율 / 데이비 - 장율




한 번 망가지면

그건 그냥 망가져 버리는 거고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마지막 남은 원망의 대상인 폴에게 제대로 된 위해나 복수를 하지 못하는 가여운 인간. 

누군가의 소중한 아이였을 폴이라고 생각해서 알란은 더 하지 못했다. 


결국, 복수도 실패하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한 실패와 실패만 남은 남자. 


'아빠'라는 말의 무게를 점점 알아가는 알란이 안타깝다. 


사랑스럽고 단단한 아이를 상상하는 알란이 가여웠다. 


다시는 자신의 손에 데이비의 손을 쥘 수 없을 텐데. 

데이비에게 더 나은 가능성, 나은 삶을 선물해줄 수는 없을 텐데. 





억지긴 해도 미소로 답해줘요. 

모든 게 다 괜찮아 질 거라는 듯이.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런 미소를.

이게 어떻게 공평해?

참을 수가 없었어요.




데이비가 너무 불쌍했다. 가여웠다. 


크고 까만 밤에서 어둠을 본 게 아니라, 반짝이는 별과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받는 폴.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별까지 갈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었던 폴. 

비탈길을 내려올 때 의지할 손이 있었던 폴. 

자신에게 애정을 담아 애칭으로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는, 그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폴. 


데이비가 자신의 '것'이라고 칭하는 건 무조건 적인 사랑을 주는 강아지 메이시. 

크고 까만 눈에서 비친 자신을 보고 있었을 데이비. 

창문을 타고 지붕으로 넘어갔을 때, 자신이 다쳤을 것을 걱정해 준 건 메이시뿐이었던 데이비. 

데이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보다 '야' 혹은 그 외의 욕들로 불리는 데이비. 



세상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것 같은, 손을 잡아주고 미소를 지어주는 아빠가 있는 자전거의 주인. 


데이비는 받을 수 없던 미소, 가능성과 기회. 

할 수 없던, 될 수 없던 더 나은 사람. 





사실은 폴의 역할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감정 없는 서술자, 극의 진행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캐릭터. 


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극을 봤는데 폴이 생각보다 더 많이 중요한 캐릭터였다. 


킬롤로지 라는 게임을 만들게 된 생일 파티부터 상기되어있고, 과장되어 있어서 

가볍다, 는 느낌보다 '미쳐있다'는 느낌에 가까워서 사실 보는 동안 힘들었다. 


그런데 또 그 감정선이 알란이 복수를 할 때는 

알란의 감정을 전혀 이해할 생각이 없고 

이 상황을 면피하는 것에만 급급해져 있어서 

그의 배에 끌을 박아 넣는 알란의 마음을 백배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건 또 약간의 유머.




각 인물의 서사를 따라 사건을 나열하는게 고통스러운 극이다.


폴이 가진 것들을 영원히 가지지 못할 데이비에게 미안해서.

알란의 상상 속 데이비가 따뜻하고 다정할수록 데이비가 가질 수 없던 수많은 기회가 아파서.








킬롤로지 (KILLOLOGY)

알란 - 김수현 / 폴 - 김승대 / 데이비 - 장율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그를, 그들을 '아빠'답게, '아빠'가 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알란은 아빠가 될 수 있었지만, 폴은 될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

그리고 알란도 영원히 될 수 없던 '아빠'에 대하여.

결코, 잡을 수 없던 손.
잡아주지 못했던 그 손.


가장 최전선에서 보호해줘야 할 가족이 아이를 보호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가 손을 잡아주지 않았을 때.

그리고, 자신의 얼굴로 향하던 그 손을 기억하고 있는 아이의 손이
그 손이 다른 아이의 얼굴로 향할 때.

폭력을 대물림하는 아이를 보호해주지 않는 책임감이 없는 어른.
(폴의 경우는 인정욕구에 가까운 느낌이긴 하지만, 어쨌든 첫공이었으니까)



*


아빠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하다가
작은 세계부터 큰 세계까지 아우르는 이야기구나

라는 걸 극이 진행될수록 역순으로 보여주는데 이게 진짜 머리 위에 느낌표 백 개 뜨게 한다.


데이비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가해자이자 피해자. 희생양임을 보여줘서 자꾸 마음이 아프고.

아빠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모두 알란의 상상이기에 죄책감이 더 든다.

좋은 것을 주지 못하는 어른, 누군가의 보호자가 아니라 사회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하는 느낌.
물론, 그게 현실적인 나의 위치지만.




*



길모퉁이를 돌아 나가면 볼 수 있는 폭력부터 전쟁까지.

다른 인물들이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이야기들을 독백으로 쏟아낸다.

많은 폭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야기가 어딘가 한 곳에 치우쳐져 있지 않아서 놀랐다.

그 이야기들이 모두 하나의 총구에서, 극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택'에서 비롯된 일임을 알게 되는 순간
관객으로서 희열을 느끼기도, 조금 충격을 받기도 했다.

폭력적인 묘사들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들에 무뎌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놀랐다.

하나하나 해체하고 들자면 쉴 새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오랜만에 본 여러모로 '잘 쓴' 작품이었다.


데이비는 영원히 성장하고,
폴은 자신의 아버지를 답습하려하지만 그 가까이 가는 것을 실패하고,
알란은 데이비가 죽고 나서야 아버지가 된다.

폭력이 폭력을 낳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던 극이었다.


사실 참담하고 비참하고 안타깝고 아픈 텍스트들이라,
재미있었다, 흥미로웠다는 말을 쓰는 게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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