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의 이득과 다른 쪽의 손실을 더 하면 제로(0)가 될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 이론을 통해 현실 속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끔 그런 극을 보고 나올 때가 있다. 

창작자의 의도대로 극을 알고 가는 것도 좋지만, 내 해석을 계속 가지고 있고 싶을 때. 


제로섬 게임이 그런 극이었다. 

그래서 관객과의 대화에는 참여하지 않고 빠르게 나왔다. 











갱지(!)

안내문이라니. 


참여하는 극인가 하다가, 극을 보기 전 이렇게 세계관과 내가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을 구분짓는 그 구분점 좋다. 















시스템의 부외자 



하루키가 취준생이라는 설정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하루키라는 존재가 빠진다 해도 세상 어디에도 구멍이 나지 않으리라는 데서 비롯한 것 같다. 


시스템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자가 왜 시스템에게, 자연의 섭리에 협조해야 하는가. 


자연의 섭리에 언제까지 무릎을 꿇고, 순응해야 하는가. 


인간은 삶을 개척할 수 있는가.. 까지 생각이 가버렸는데. 






 




시스템과의 거리.

현실과의 거리.


하루키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평범함 그 언저리의 거리. 

현실 속의 나도, 극 속의 하루키도 어쩌면 영원히 행복해 질 수 없겠구나. 




하루키의 고백이 징징거림으로 들리지 않았다. 

열심히 살고, 또 남들과 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나는 왜. 


나는 중요하지 않고, 나는 작고 작고.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아주 잘 돌아가니까. 


그런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인생이나 세계에 아주 작은 균열이라도 줄 수 있다면. 


시스템 밖으로 향하는 하루키의 선택을 그래서 옳다고 느꼈다. 

존중할 수 있었다. 











보는 동안 점점 무게에 짓눌렸다. 


시스템이 멈추고, 하루키의 한탄이,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그게 내 이야기 같았다. 


하루키에게 가해지는 시스템의 압박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나는 하루키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인데, 왜 그 시스템의 밖에 있는가.

나는 불행하지 않으니 다행인가, 라는 결론이 도출될 정도로 극이 가진 압박감이 남달랐다. 





이게 극이 아니라 사실 어딘가에 진짜 하루키가 있고, 그 하루키가 선택을, 방향을 강요당하고 있다면. 

나는 시스템의 편이 아닌 하루키의 편에 설 것이다.


(사진 출처 : 두산 아트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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