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내 모든 걸 버리고
앙리가 그어놓았던 선. 실험을 위한 살인은 하지 않기로 했는데, 월터의 머리와 장의사의 시체를 보고 짧은 순간에 앙리는 결심한다. 생명의 존엄함을 믿었던 앙리에게 빅터가 저지른 살인은 가치관을 다 무너뜨리는 일이었지만, 앙리는 도덕과 신념이 아닌 꿈인 빅터를 따른다.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끌려가며 잠시 뒤를 돌아보는 앙리의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죽음은 무섭고, 앞으로 찾아올 영원한 어둠은 두렵지만 구원자인 빅터를 믿는다.
앙리는 빅터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것처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해졌던 운명이니 너는 너의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빅터를 살리고, 빅터의 연구에 동참해 그의 삶을 바꾸는 것이 운명이 정한 길이라면, 빅터의 운명을 자신이 바꾸겠다고.
앙리는 빅터를 만나 함께 연구하던 그 순간부터는 고독하지 않았고, 나약한 모습도 아니었다. 빅터의 연구를 끝까지 어떤 형태로든 함께 하는 것이 앙리 생의 목표였다. 함께 하던 연구는 어떻게든 빅터에게 새로운 미래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자신이 없어도 빅터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삶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고, 운명은 뒤틀리는 시간과 맞닿는다
천둥번개 소리에 괴물은 눈을 떴고, 몸에 모포가 덮여있었을 뿐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맨살에 닿아오는 철 침대의 서늘한 기운, 기계가 돌아가서 뜨거웠을 실험실의 공기에 괴물은 숨을 뱉어낸다.
그것은 목소리와, 숨소리와, 그림자와 닮아 있었다. 짐승의 소리라기보다 인간의, 산 사람의 소리라기보다 죽은 사람의 소리였다. 그것은 소음이었으나 꿈이었다. (중략) 아마도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로 시작되고 한숨으로 끝나고 있을 그 외침은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헐떡임과 그것을 시작하는 아기의 울음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과 꼭 같은 곳에 있었다. 1
괴물은 자신을 ‘앙리’라고 부르는 빅터의 목소리를 기억 속에 새기며 자신이 앙리라고 믿었다. 자신에게 눈을 맞추고 손을 내미는 빅터의 따뜻한 온기. 철 침대와는 확연하게 다른 감각에 괴뮬은 빅터에게 몸을 의지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흥분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비명은 갓 태어난 생명에게 자극적이었다. 괴물은 처음으로 입안에 뜨거운 게 퍼지는 걸 느꼈다. 무엇인지 설명해줄 대상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자신을 저주받은 존재-라 칭하고 쇠사슬로 목을 조른다. 겨우 ‘숨’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는 순간인데 그것이 끝나려고 한다. 쇠사슬을 벗어난 자신을 향해 울부짖고 있는 존재의 생각을 아직은 이해할 수 없지만 왜 내게,라는 단말마의 울음을 내뱉고 살기를 선택한다.
도망가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등 뒤로 들리는 총소리에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숲 속 깊은 곳으로 내달렸다. 눈과 비를 피해 숨을 곳이 없다. 창조주에게 존재를 부정당한 괴물에게 있는 건 코트 하나뿐이다. 단 한 번의 따뜻했던 손길. 괴물은 그 온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옷깃을 여민다.
자신을 빅터라 말하던 창조주의 눈빛과 자신을 향해 뻗었던 손을 기억한다. 자신을 ‘앙리’라고 불렀기에 그 이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빅터는 자신의 탄생을 반겼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빛이 변해 목에 차가운 쇠사슬을 감았다. 창조주에게 생존을 위한 방법은 배우지 못 했다. 괴물이 알고 있는 건 외로움과 절망, 존재에 대한 혼란과 추위, 쇠사슬이 뜻하는 게 끝이라는 것 뿐이었다. 갓 태어난 생명체가 겪기에는 벅찬 혼돈에 두려워 떨며 울었다. 괴물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탐구가 아닌 삶에 대한 열망으로 숲 속에서 마을로 향했다.
(중략)
진짜 나는 누구인가
괴물은 자신의 존재가 정립되지 않아 빅터를 찾아왔다.
자신의 탄생 이유엔 실험 일지에 쓰여 있는 이유 말고 다른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창조주인 그를 사랑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죽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빅터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지만 돌아오는 빅터는 자신의 존재가 아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묻고 있었다.
빅터는 괴물을 인정하지 않았다. 괴물을 앙리라고 부르고, 괴물은 앙리라는 이름에 염증이 날 만큼 괴롭다. 탄생하자마자 빅터에게 들었던 이름, 실험일지에 언급되는 빅터의 친구 앙리, 그리고 지금의 자신을 보고 부르는 이름도 앙리.
당신이 나를 부르는데 왜 내 이름이 아닌지 궁금해졌다. 2실험일지의 내용을 되묻는 괴물에게 아니라고 말하며 괴물의 존재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빅터의 행동을 보고 자신은 앙리를 살리려다 만들어 낸 실패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유를 듣기 위해 돌아왔지만, 더 큰 상처를 받았다. 과거를 들춰내는 순간부터 자멸할 수밖에 없다. 빅터 앞에서 괴물은 없어지고, 앙리의 껍데기만 남았다. 그는 괴물이지만 앙리다.
괴물은 격투장에서 돈 때문에 인간이 죽는 모습을 봤고, 거짓말과 배신, 상대를 이용하는 법을 배웠다. 엘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괴물은 증오하는 상대인 인간에 가까워진다.
괴물은 망가진 기계를 보고 괴로워하는 빅터를 보며 웃는다. 완벽한 복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아 고독하게 만드는 것. 괴물이 세운 복수의 계획은, 신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려 했던 빅터를 벌하듯 타이밍마저 맞아떨어진다.
괴물은 실험 일지 속 빅터와 앙리의 기억 속의 빅터를 알고 있다. 자신과 같은 존재가 다시 나오지 않길 바랐고, 누군가가 안식을 빼앗기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실험실의 기계를 망가트린다. 괴물의 예상대로 빅터는 누나를 다시 살리려고 실험실로 오고, 망가진 기계를 보며 빅터는 괴로워한다.
그런데 빅터는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괴물에게서 앙리를 찾으려 한다. 자신의 존재를 끝까지 실수라고 말하며 신인 척하는 교만한 빅터가 끔찍하고, 진절머리 났다.
빅터에게 옷깃을 잡힌 괴물은 웃고 만다.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는 빅터를 향해 괴물은 고개를 내젓는다. 빅터가 없으면 자신도 없다. 존재하지만 믿을 수 없는 신과 함께 사는 삶. 모든 걸 빼앗긴 내 마음을 알겠어, 빅터?
그의 상처에는 이름이 없다
괴물은 바람 소리와 호숫가 근처의 서늘한 기온이 있는, 처음 탄생하던 그날과 가장 비슷한 곳을 찾아냈다. 끝없이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던지던 괴물의 마음을 대변하는 곳. 우는 아이는 혼란스러운 자신의 모습 같기도 했고, 악의 없는 선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이를 곁에 앉히고 같은 하늘을 바라본다.
아이가 괴물의 목에 있는 상처를 이야기할 때, 이 아이 또한 인간인 것을 깨닫는다. 상관없는 아이가 어린 빅터처럼 보일 정도로 빅터에 대한 원망과 인간에 대한 증오가 강했다. 괴물에게 아이는 빅터였고, 앙리였으며, 기억이었고, 피가 흐르고 있는 상처 그 자체였다.
앙리의 머리로 실험을 해서라도 자신의 행복만을 꿈꾸던 빅터는 자신이 태어나자 자신의 존재 자체를 실패로 간주해 자신을 죽이려 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추악한 면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 자신을 괴롭히는 또 다른 존재인 인간 앙리의 기억이 준 상처와 자신을 생명으로 보지 않았던 빅터가 준 상처를 호수에 수장시킨다. 괴물은 빅터를 위해 앙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빅터가 자신을 온전한 생명체로 바라보고 이해하길 원했다.
괴물은 빅터의 눈을 속이기 위해 용병으로 변장해 줄리아마저 죽이고, 빅터를 세상에 홀로 남게 만든다. 혼자서 눈물로 살던 3년의 상처를 빅터가 알기 원한다. 빅터와 자신의 관계를 종지부 짓기 위해 선택한 곳은 태어난 곳인 실험실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상향이자 낙원. 세상의 끝이자, 자신 생에의 끝인 북극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그곳, 괴물은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빅터가 느끼길 바라며 북극으로 빅터를 불러낸다. 어느 누구도 빅터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고통스러운 우리의 삶을 끝내줘
괴물은 빅터의 허벅지에 있는 칼을 보고도 빅터를 안아든다. 자신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고통스러운 삶은 빅터로 인해 시작되었으니, 빅터가 끝내야 했다. 그래서 괴물은 빅터의 칼에 찔려 괴로워하면서도 빅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총을 건넨 건 복수이면서 구원이었다. 앙리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괴물로서의 삶을 끝내고 싶었다.
괴물은 빅터에게 단순한 사랑을 갈구한 것도 아니었고, 증오가 가득한 복수가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유 없는 증오란 없고, 괴물의 증오는 사랑보다도 더 강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곳에서 곁에 아무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이 끔찍한 일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빅터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괴물은 자신의 삶에 대한 열망 대신 존재 가치를 쫓아 빅터에게로 돌아왔다.
빅터의 총에 맞은 가슴 언저리에서 피가 흐르면서 묻지 못 했던 기억이 새어 나간다.
괴물도 앙리도 아닌 이해받기를 원했던 한 존재만 남았다. 괴물은 마지막 힘을 짜내 빅터를 향해 손을 뻗는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빅터, 이해하겠어? 내가 겪었던 세상과 인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흘리는 눈물의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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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글의 전문은 2014년 발행된 프랑켄슈타인 메모리북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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