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내 이름 말해줄게
날 영원히 기억해줘요
오늘 문득,
여명의 눈동자는 세 사람의 일생이 담긴 극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곳을 지켜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1막은 그들의 이야기, 2막은 잊혀진 죽은 자들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죽음들.
오늘 낮 공연은 그 이름을, 그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여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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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시작하는 극은 여옥의 일생을 다시 되짚는 그 과정을 함께 하는 기분이다.
여옥이 재판소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극이 시작되는데
처음 대치를 만나 말할 때와는
너무나 다른 온도 차가 그간 여옥의 생을 압축시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재판에서 위안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여옥이 어떤 사람임을 판단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데...
여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드는 생각은
아무도 여옥을, 그리고 그 사람들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 해서는 안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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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판에서 하림이 여옥에게 '당신은 그저 위안부'라고 말하고 나면
꽤 한동안 적막이 찾아오는데 가슴이 무너진다.
당신이 뭐라고, 그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말하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하림이 제주에서 대치에게 말했던 것처럼.
남원에서 난징으로, 난징에서 사이판으로.
여옥이 긴 여정 동안 단 하나의 약속을 믿고 살아왔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인 사람에게 그 모든 걸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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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이 상황을 보고하거나, 재판에서 진술할 때
하림을 스쳐 지나가는 앙상블들을 보고 있으면
하림은 극의 내부자이지만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 같기도 하다.
이 극적 장치 때문에 눈물이 더 나는 것 같다..
하림에게 여옥은 '희망'을 말하고, 보게 하던 유일한 사람이자.
신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며 지켜야 하는 빛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오늘 들었다.
재판정에서 최두일이 '좌익에 물들어' 이 가사가 나오면
테하림의 눈빛이 변하는데 이 부분이 정말 좋다.
악몽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라고 울부짖던 그 하림이 아니었다.
몇 글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강세를 주는데
여옥때문에, 단 한 사람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자신의 삶과 가족을 그들이 왜 잃어야만 했는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금껏 버텨왔던 사람 같다.
비록, 그 악몽은 또 반복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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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를 향해서 총을 겨눌 수가 있나
오늘 유독 1막에서부터 동진의 노래가 가슴에 박혔다.
손을 잡고, 매일 다른 옷을 입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고향 제주가
피로 물 들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고 노래하는데 눈물이 왈칵.
동진이 스스로 선택하고 가족과 제주를 지키는 것을 선택하고.
왜놈들도 이렇게는 안 했다고 말할 때.
인간의 잔혹함과 생존본능에 치가 떨린다.
동진이 총을 맞고 쓰러지고 나면
(내)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슬프다.
모두가 바란 건 곁에 있는 가족이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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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대운이를 보고 참담한 표정을 짓는 달삼동지를 보면
그가 순진하다는 대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다.
누군가가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에서 꼭 그 아이가 죽어야만 했을까.
여옥이 대운을 껴안고 울기 시작하면
내가 너무 미안해서, 괴로워서 같이 울게 된다.
대운을 끌어안고 대치에게 내주지 않으려 하는 걸 보면
대치가 원망스러워서, 오늘은 당과 인민의 선택을 존중할 수 없었다.
대치에게 자신은 대운이가 있는 이곳에서 죽겠다고 말하는데.
*상상해봐, 앤드루, 소중한 아들을 몸이 부서진 새처럼 그 차가운 돌 속에 내려놓고 떠나야 하는 고통을.
얼마 전 읽은 책의 문장이 떠올라 여러모로 고통스러웠다.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그 고통을, 겪어온 그분들이 생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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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가족과 만나고 있는 여옥을 보면서 옅게 웃고 있는 하림을 보면...
이 장면은 하림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하림의 꿈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는데
하림을 스쳐 가는, 기록되지 못했을 수많은 사람.
대치와 하림의 시선이 맞는 순간 눈물이 왈칵..
그들이 살아있길 원한, 그들이 보기를 원한 그 새로운 세상이 오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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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석에 앉아 있으면 바람 소리와 함께 앙상블들이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나고.
내 바로 앞에 배우들이 철조망을 만들고 있고.
점점 어두워지는 조명 속에서 목놓아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극에서 말하는 잊혀진 그 죽음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 같아서 늘 슬프다.
자본과 여건이 넉넉하고, 무대효과가 넘쳐나는 극들을 보다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전해야 하는 목소리를 믿고,
사람들이 올린 무대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전에도 한 번 쓴 적 있지만,
진심이 전하는 목소리는 나를 속수무책으로 울게 만든다.
* 바르도의 링컨 - 조지 손더스, P.37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