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돌아오지 않는 대상을 기다리는 것과 곧 돌아올 대상을 기다리는 것.
그 간극에 대해 1년 가까이 생각했다.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이제 곧 돌아올 나의 괴물, 프랑켄슈타인.
01
앙리 뒤프레의 드라마는 1막에 절반 이상 나오는 데도 공감과 이입에 약간 많이 어려움이 있었다.
반대로 탄생부터 죽음까지 극 속에서 함께하는 괴물의 드라마는 탄탄했다.
어미 잃은 강아지 같던 지괴는 7지괴 후 더 단단해진 것 같은 괴물이었다.
상처 입을수록 두터워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여리고 상처받아서 낑낑거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한없이 순수했던 괴물이 아니었나 싶다.
지식으로서의 순수가 아니고, 순수한 존재 그 자체.
냉정했던 은괴물은 후반부로 갈수록 더 여려졌다.
북극을 상상하며 예쁘게 웃던 어린 괴물.
은괴물은 상처 입을수록 생살이 드러나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절망에선 마침내 웃어버렸고.
조소, 혹은 허탈함이 담긴 듯한 웃음이었는데, 그 웃음이 갈수록 자조적으로 변했다.
그러면서도 괴물이 처한 상황 자체가 안쓰러운 것과는 상관없이
둘 다 신이 될 수 없었던 인간 빅터를 심판하는
'신의 대리인' 같은 모습을 띠고 있었던 부분에서는 또 너무나 같았다.
어떤 모습이 되었든 인간을 초월했지만, 인간보다는 나약했던 피조물.
02
앙리는 원했을지 몰라도, 괴물은 원하지 않았던 생.
극을 보는 내내 단 한 번도 그의 죽음과 탄생 앞에서 눈물 흘린 적은 없지만, 괴물을 볼 때마다 마음이 멍든 듯 미어졌다.
아름다운 창조물인 나의 괴물은 너무나 아팠다.
괴물의 생은 지독하게 괴로웠다.
나는 누구죠, 가 아닌 나는 무엇이죠? 라고 물어야 하는 가련한 생명체.
손을 대면 도드라지게 만져지는 목의 흉터가 생이고 삶이고 죽음이었다.
빅터가 유일하게 그에게 남긴, 새로운 생명을 얻는 대가로 얻은 온기는
매일 밤 그가 찾아오는 꿈, 단 하나였다.
괴물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왜 태어나야만 했는지 궁금했다.
격투장에서의 기억으로 자신이 앙리지만, 앙리가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죽은 앙리의 껍데기, 빅터의 코트, 그리고 실험일지와 몸 한가득 봉합되어 있던 자국들.
괴물이 빅터에게 찾아간 이유는 단순히 복수나 피 끓는 부정 같은 것이 아니었다.
돌아가려고 했던 건 빅터는 그에게 ‘따스한 어둠’이기 때문이다. 2
그는 그 따스한 어둠을, 환하고 아름답게 빛나던 찰나로 기억하고 있다.
빅터에게 단 한 번 축복받았던 따스한 품과 음성은 괴물에게 아련한 신기루 같은 것이어서, 그걸 잡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걸까.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어두운 숲을 헤치고 상처 입은 맨발로 그에게 왔던 걸까.
그의 따스한 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 한 번 닿았던 손의 따스한 온기.
괴물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그 존재는 너무나도 외로웠다.
그러나 죽음의 끝과 삶의 시작에서 '그 존재'가 보았던 것은 희망인 양 구는 어둠이었다.
03
빅터 프랑켄슈타인, 나의 창조주여.
괴물은 빅터와 대면한 후 3년 동안 속으로 삼키던 빅터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본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단 한 사람을 향한 그 목소리가 그토록 아파야 한다니.
서늘하지만 원망이 가득 담긴 부름에 빅터가 고개를 들 때마다 심장이 불에 덴 듯 내가 다 아팠다.
괴물이 견딘 3년의 세월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빅터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너’라는 이름으로.
존재에 대한 부정도 긍정도 아닌 왜 도대체 '너' 여야만 했느냐는 원망 섞인 의문이었다.
그 말에 괴물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는 것 같았던 것 착각이었던 걸까.
자신은 앙리도, 인간도, 피조물도, 아닌 괴물이다.
그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빅터가 인정했던 단 한 순간.
인간으로 만들어졌으나 외면당해야만 했던, 사랑을 몰랐던 이름조차 없는 가련한 피조물.
자신이 앙리가 아닌 걸 빅터가 깨닫던 그 순간.
자신이 그 어떤 존재도 아닌 빅터가 '실패작'이라고 부를 존재인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빅터가 절망해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 지를 때 울며 웃어버리는 괴물이 다시 보고 싶다.
차라리 날 찢어 죽이라는 빅터의 절규 뒤로 들려오던 괴물의 웃음소리.
넌 끝까지 살아야 해, 하고 노래할 때 이미 북극에서의 자신의 끝은 다 정해져 있었건만.
그 어떤 것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없었던 가엽고 불쌍한 나의 괴물. (20140513)
04
북극의 얼음에 비치는 빅터와 자신의 모습.
얼음에 비치는 둘의 모습은 신과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었다.
단 한 번도 인간이지 못 했던 피조물.
그가 인간이 되어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일은 빅터를 알고 있는 앙리의 모습을 한 단 한 명의 신마저 죽여버리는 복수였다.
그의 눈을 보고 괴물은 후회했을까.
이해받을 수 없는 통증이었다면, 그런 상처였다면.
그가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아픔이었다면, 이런 끝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삶 자체가 고독이었던, 기댈 곳 없어 숲 속에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했던 괴물을.
빅터는 더는 숨 쉬지 않는 존재를 앞에 두고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초연 내내 이 부분에 대해 고민했고, 아직 그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05
원작의 프랑켄슈타인은 사랑과 축복만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의 비극과 저주의 시작은 괴물을 창조한 것,부터 시작이었다.
결국, 둘의 운명이 얽혀 한 존재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불행한 서사였다.
원작의 생명 창조는 다분히 과학자로서, 더 두려울 것이 없었기에 신과 우주의 비밀에 도전하는 행위였고.
뮤지컬에서는 불행한, 저주받은 삶을 극복하려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둘 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관해서 철저하게 외면했기에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뮤지컬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유년기는 너무나 불행했다.
원작과는 다르게.
괴물은 처음부터 살기 위해 살인을 택했다.
재연에도 크게 고치지 않는 이상 인정받아야 했는데 배척당해야만 했던 여린 두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가겠지.
서로의 삶의 궤적을 늘어놓으며 누가 더 연민 받아 마땅한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만 남게.
06
뮤지컬이니 생략하고 넘어간 전개들 속에 까뜨린느와 줄리아가 너무나 많이 생략 당했던 초연.
전개+이야기의 구멍 메우기가 정동야행에서 봤던 가사를 바꾸는 거로 끝나지 않기를.
너무 큰 바람이겠지만...
초연과 완전 다른 극 일거라는 걸 생각은 하고 있는데 내 마음속엔 초연이 크게 자리 잡은 것 같다.
빅터와 괴물 둘 모두에게 마음을 줄 수 있을까, 가 가장 궁금하다.
극의 서사 자체는 빅터에게 많이 할애하고 있는데
더 안타깝고 마음이 가는 건 괴물이었으니까..
07
나는 입을 열 수 없다.
말이 되는 순간, 어떠한 대답도 또 다른 질문이 된다.
빅터가 괴물의 눈빛을, 괴물이 빅터의 눈빛을.
서로가 가진 원망과 상처를, 한번에 이해했다면.
그 둘은 수 많은 죽음들 앞에서 서로를 안아줄 수 있었을까.
08
2014년 5월 13일의 나의 괴물을.
한 개의 밤만 지나면 만날 수 있을까.